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빌리 브란트 (문단 편집) == 사생활 == * 본문에도 나와 있지만 [[사생아]] 출신이다. 정계에 진출한 후 이와 관련하여 인신공격을 받기도 했다. 게다가 브란트가 본인의 [[출생의 비밀]]에 대해 일체 함구했고 사민당도 그의 출생과 사생활을 터부시했기 때문에 그의 출생의 비밀과 사생활을 둘러싸고 여러 의혹이 난무했다. 그리고 그런 의혹과 루머보다 실제 진실이 더 복잡한 것이기도 했다. 총리 인준 표결 당시 나타났던 몇몇 무효표에는 '프람은 절대 안됩니다.'라는 글귀도 있었는데, 이는 사생아 출신에 출생과 관련된 여러 의혹이 난무하던 브란트를 비꼰 것이었다. * 국내 저서에는 그가 세 번 결혼했다고 나온다. 법적으로 세번 결혼 한 것은 맞다. 그러나 20대 시절인 1930년대에 게르투르트 마이어와 수년간 [[사실혼]]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해외 서적에는 그가 네 번 결혼했다고 서술하는 경우도 있다. * 진보 정치인으로 드높은 명성과 달리 사생활은 상당히 추잡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총리 사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매춘부들과의 섹스 중독을 차치하고도, 결혼 생활도 매우 순탄치 못했다. [[1941년]] 노르웨이에서 노르웨이인 안나 카를로타 토르킬센(Anna Carlotta Thorkildsen)과 결혼했다. 1940년 이미 그와 안나 사이에서 첫 딸 니냐 프람(Ninja Frahm)이 태어난 후였다. 아래에도 나오듯이 빌리 브란트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없었지만, 혼외 상태에서 딸이 출생한 후 안나의 친정 가족과 친척들이 몰려왔다. 안나의 친정집이 경제력이 있었기에 브란트는 결혼을 택했고 이후 경제적 어려움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결혼한 이듬해인 1942년부터 빌리 브란트의 외도가 시작되며 그들의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났고, 1944년 별거에 들어갔다. 1947년 브란트와 안나의 이혼이 법원의 승인을 받자 브란트는 루트 한센과 재혼했다. 1948년 브란트가 서독 국적을 회복하며 본명 헤르베르트 프람 대신 빌리 브란트로 개명했지만, 딸 니냐는 아버지의 성을 따르지 않았다. * 첫 번째 결혼을 하기 전에 브란트는 같은 고향 [[뤼베크]] 출신 사민당 동지였던 게르트루트 마이어(게르트루트 가슬란)와 동지이자 사실혼 관계였다. 뤼베크에서 10대 시절 사민당에 가입하면서 알게 된 그들은 1933년 나치가 집권하여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자 당시 각각 20세, 19세였던 그들은 [[노르웨이]]로 망명했다. 이후 이들은 20대 시절 동안 노르웨이에서 동거하며 지하에서 사민당 활동을 이어갔다. 이들은 사실혼 관계였지만, 그들은 노르웨이 시민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고, 마이어는 자신과 브란트와의 관계를 숨기고, 노르웨이인 군나르 가슬란과 위장 사기 결혼을 했다. 위에 서술되어 있는 빌리 브란트의 노르웨이 시절 가명 군나르 가슬란은 바로 마이어의 남편의 이름이었다... 그러던 1935년 브란트와 마이어는 오슬로 대학에서 강의하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명한 성심리학자인 [[빌헬름 라이히]]와 알게 되었다. 라이히는 [[독일 공산당]]원이었지만 섹스 정치(Sex-pol)를 주장하다가 공산당에서 추방당했다. 나치도 학계에서 비판받고 있던 라이히의 연구를 불건전하다며 탄압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는 1934년 독일을 떠나 [[오슬로 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오슬로 대학 부근에 살고 있던 브란트와 마이어는 1935년 라이히의 성행위와 오르가즘 연구 실험참가자 모집 공고를 보고 실험에 참가하면서 라이히와 알게 되었다. 브란트는 섹스와 오르가즘에 대한 연구에 빠져 일각에서 변태 사이비 학자로 매도당하던 빌헬름 라이히와 친해졌다. 그리고 마이어도 라이히와 점차 가까워졌다. 마이어는 라이히의 비서이자 그의 오르가즘 연구실 실험 조교로 일하게 되며 라이히의 섹스와 오르가즘 실험을 도왔다. 1940년 빌헬름 라이히가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떠날 때 마이어도 라이히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갔다. 마이어가 라이히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자 브란트는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상처를 받고 좌절했다. 마이어가 떠난 직후 그는 안나 카를로타와 동침하였고, 안나는 곧 임신하게 되었다. 브란트는 그녀를 진지하게 사랑하지 않았고, 처음에는 결코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1940년 안나가 딸을 출산하자 그녀의 친정 가족들이 몰려왔다. 결국 브란트는 1941년 안나와 결혼했고, 결혼 이후 브란트는 출판업계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오던 아내 안나 카를로타와 그녀의 친정 아버지의 경제력 덕분에 경제적으로 불안정하던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게르트루트 마이어와 동거하며 일용직을 전전하며 지하에서 독일 사민당을 위해 일하던 그는 안나 카를로타와 결혼하면서 출판업계에서 일하는 그녀 덕분에 노르웨이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인맥을 틀 수 있게 되었다. * 두 번째 아내가 된 루트 한센(Rut Hansen -> 루트 베르가우스트(Rut Bergaust) -> 루트 브란트(Rut Brandt))은 노르웨이 여류 작가이며, 사회주의 정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이 처음 만나게 된 것은 1944년이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빌리 브란트 본인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훗날 루트 브란트에 의해 진실이 밝혀졌다. 루트에 따르면 그들이 처음 만난 것은 1942년 루트 한센의 결혼식장에서였다. 즉 빌리 브란트는 지인의 결혼식에 하객으로 갔다가 신부와 눈이 맞아 바람이 난 것이었다.... 루트는 자신의 결혼식 하객 중에 빌리 브란트가 단연 눈에 띄었다고 회상했다.... 1944년 루트의 남편(=빌리 브란트의 지인)이 아프자 루트와 빌리 브란트와의 바람은 본격화되었고, 이 시절 이미 안나와의 결혼 생활은 사실상 파탄이 난 상태였다. 1946년 루트의 남편이 병으로 죽자, 1947년 브란트는 안나와 이혼하고 루트와 재혼했다.[* 이혼 및 재혼 절차가 시작된 것은 1947년, 이혼과 재혼을 위한 법적 절차가 마무리된 것은 1948년이다.] 재혼 직후 브란트는 독일 국적을 회복했고, 이름도 헤르베르트 프람에서 빌리 브란트로 개명했다. 그리고 독일로 귀국하여 정계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이혼할 때까지 30여년간 루트는 빌리 브란트의 배우자였다. 전형적인 북유럽 스타일의 미인형이었던 루트는 교양있고 세련된 언행으로 독일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고, 빌리 브란트의 강성 이미지를 보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그러나 대외적 이미지와는 별개로 현실에서 빌리 브란트의 사생활은 매우 난잡했으나 루트는 인내했다. 브란트가 섹스 스캔들로 인해 총리직을 사임한 후에도 루트는 정치적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를 위로해주고 보살펴 주었다. 하지만 사임 이후 브란트는 자신이 총리를 사임하려 했을 때 루트가 말리지 않았다며 그녀를 비난했다. * [[1980년]] 브란트는 그때 자신을 지켜주고 위로했던 루트를 배신하고 본인의 여비서인 '''35세 연하'''의 브리기테 제바허(Brigitte Seebacher)와 세 번째로 결혼했다. 대학에서 국어(독일어)와 역사를 전공한 제바허는 사회민주당 당원이었다. 1977년 그녀는 사민당 언론홍보부에 취직하여 당사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젊은 여성 신입사원 제바허는 곧 사민당 총재 빌리 브란트의 눈에 포착되었다. 브란트 총재는 말단 사원 제바허에게 접근했고 곧 그들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입사한 지 몇달 후 그녀는 브란트의 개인 비서로 발령났고 브란트와 같은 사무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1977년 이미 그들은 단둘이서 해외여행을 떠나는 등 깊은 밀월 관계를 이어갔다. 1978년 브란트는 집을 나와 제바허와 동거에 들어갔다. 1979년 브란트와 제바허는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라인강가 한적한 곳에 새로운 집을 마련하고 이사했다. 1979년 루트 한센은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1980년 법원에서 이혼이 승인되었다. 브란트는 국민들에게 받을 비난을 의식하여 언론에 알리지 않고 비밀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브란트와 제바허는 주말마다 프랑스를 여행했고, 브란트는 [[지중해]]에 가까운 프랑스 남부 시골에 농장을 사서 별장을 지었다. 브란트가 루트를 버리고 35세 연하의 여비서와 재혼한 것이 알려지지자 크게 실망한 사람들이 많았다. 루트는 이후 죽을 때까지 브란트를 만나지 않았으며, 브란트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장례식 불참에 대해서는 루트가 본인의 의지로 불참한 것이 아니라 브리기테 제바허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했다는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브란트가 사망했을 때 제바허가 장례식에 루트를 초대하지 않은 것에 대해 독일인들은 크게 비난했다. 루트는 1980년 이혼 후 브란트와 제바허가 있는 본을 떠났지만 고향 노르웨이로 돌아가지 않고, 빌리 브란트와 전반기에 생활했던 베를린으로 이주하였고, 2006년 베를린에서 사망했다. * [[골초]]였다. 총리 재임 시절 주치의의 권고로 [[금연]]을 했는데 그로 인해 [[우울증]]이 심각하게 악화됐다. 브란트가 금연을 하던 시기에 그의 측근이자 후임 총리였던 슈미트는 내각 회의에서 무심코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브란트의 비서에게 '총리 각하가 힘들어하는데 굳이 그 앞에서 흡연을 했어야 하냐'며 잔소리를 들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후임 총리였던 슈미트 역시 엄청난 골초여서 퇴임 후에도 금연 시설은 물론 방송국 인터뷰 도중에도 제멋대로 담배를 피는 것으로 유명했다. 워낙 정치적 거물이어서 그럴때면 주변에서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뒀다.] * 상당히 강해보이는 외관과 다르게 [[울보]]였다. 선거에서 질 때마다 보좌관 앞에서 눈물을 쏟은 일이 잦았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